03.어둠에 녹아드는 별-(2)

눈을 떠보니 낯선 곳.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밤이라고 단정 짓기엔 너무 끈적거리고 농도 짙은 어둠이 주변을 휘감고 있다. 어리둥절한 기분에 잠시 일어나 앉아 두리번거리다가 뒤통수를 강타하는 충격에 손을 올렸다. 뒤통수에서 묻어나는 흥건한 피, 그리고 자신의 짧고 짙은 머리카락이 아닌 길고 가는 머리칼이 손가락에 얽혀있었다.


"이게…대체 무슨 일이지? 여긴 또 어디야? 난 분명히 학교 옥상에서…"


무심코 올려다 본 하늘은 칠흑 마냥 새카맣다. 눈을 떴는지 감았는지 조차 가늠하기 어려운 어둠. 당장 눈앞의 사물을 분간하기도 어려워서 섣불리 움직이기 힘들었다.

몸을 일으키려 애쓰지만 온 몸을 자극하는 강렬한 통증. 두들겨 맞은 듯 심한 통증을 호소하는 온 몸은 저절로 식은땀이 삐져나올 정도였다. 그때, 눈앞에 내밀어진 가느다랗고 하얀 손 하나. 손을 따라 고개를 올리자 낯익은 것 같지만 본 적 없는 누군가가 서 있었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도통 기억이 나지 않아. 저 사람은 누구지?'


"누구세요?"


분명 묻는 말이지만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궁금해서 묻는 말투가 아닌 것 같았다. 퉁명스럽고 시큰둥한 어조. 하지만 낯선 곳에 떨어진 나름의 경계심을 담아 물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서 오세요, 이번의 '별'님."


왠지 익숙하게 들리는 저 별이라는 호칭. 비단 자신의 이름이 '별'이라서가 아닌, 어디선가 들어본 저런 식의 호칭. 게다가 눈앞의 사람은 어둠에 가려져 형체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희뿌연 무언가였다.

머리가 깨질 것 같은 아픔에 부여잡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몸을 일으켰다.

왠지 묘한 기시감을 느끼며 별은 퉁명스레 입을 열었다.


"자꾸 별, 별 하는데 그 별이 대체 뭘 말하는 겁니까?"


그러자 무언가의 존재는 작게 웃었다.


"하늘을 보세요. 별이 하나 보이지요? 그게 당신의 별이랍니다."

하늘을 보았다. 아주 조그맣게 반짝거리는 별 하나. 있는 지 없는 지도 사실 잘 모르겠다.


"저게 제 별이라구요? 전 그냥 보통 일반 사람인데요. 별을 가질 수 있을 리 없잖아요."


"후후, 당신이 이 세계로 온 것은 당신이 수행해야 할 사명이 있기 때문이에요. 당신은 이 세계의 어둠과 대적할 수 있는 유일한 '별' 이랍니다."


'이건 또 뭔 개 풀 뜯어먹는 소리래.'


미친 사람을 보는 것처럼 빤히 봐 줬더니 음영으로만 보이는 그 존재가 웃는 기척이 났다. 모습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기척으로 웃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별 이란 어둠속에서도 유일하게 빛을 잃지 않는 존재지요. 그것이 이번엔 당신입니다."


"그럼 그 어둠이란 뭔데요?"


뚱하게 들리는 내 목소리에 그 존재는 잠시 기척을 죽이더니, 이내 천천히 답해 왔다.


"이 세계를 지배하는 것이요."


나는 어지러워지는 머리를 붙잡았다. 진짜 뜬구름 잡는 소리, 아니 도통 알 수 없는 소리만 해댄다.


"이 세계를 지배하는 것이며 이 세계에 존재하는 어떤 것으로도 대적할 수 없는 것이죠. 그래서 당신이 이곳에 온 겁니다. 그것도 당신이 처음이 아니랍니다. 여기 이 세계는 이방인들의 도움 없이는 지탱할 수 없는 아주 불완전한 세계거든요."

웃고 있는 무언가가 왜 일그러져 보이는지 알 수가 없다. 중요한건 난 옥상에서 떨어졌는데 지금 이러고 있다는 거다. 마음이 삐딱한 건가 싶었다.


"원래 내 세계의 나는 그럼 죽은 겁니까?"


그러자 그 존재는 고개를 저었다.


"이 차원과 그 차원은 흐름이 달라요. 하지만 그 차원에서 처해진 상황에 따라 그 다음 상황이 따라오겠죠. 모든 것은 인과 관계로 연결되어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내가 죽었다 하더라도 이상하지 않다. 난 학교옥상에서 떨어졌으니까. 그런데 왜 마음이 평온한지 모르겠다. 죽었으면 어떻게 되는 거지?


"그렇다면 원래 내 세계에서 내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는 겁니까?"


그건 당신이 사명을 완수하면 자연히 알게 될 거에요. 여기에서 제가 알려드릴 수 있는 방법은 없군요."

이건 또 뭐하자는 건가. 부아가 치미는데 딱히 뭐라 할 말이 없다. 일단 이리로 빠져버렸으니 이거든 저거든 해보고 얼른 돌아갈 수밖에 없겠군.


"그럼 제가 여기서 뭘 하면 되죠?"


그 존재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별 이라는 존재는 어둠의 절기, 이 세계의 목숨이 경각에 달리면 항상 나타나게 됩니다. 어둠의 절기가 되어 어둠의 힘이 강해지면 이 곳은 빛을 잃는답니다. 그러나 별은 어둠속에서도 빛나는 존재. 어둠이 있어야만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둠을 제어할 수 있는 자는 별의 존재뿐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기다리고 있지요. 별의 구원자가 나타나 어둠을 잠재우고 이 세계의 혼란을 눌러주는 것을요."


"그럼 제가 그것을 해야 하는 겁니까? 무슨 수로?"


기가 막혔다. 뭘 어쩌라는 건가. 뜬금없이 무슨 구원자니 뭐니 알 수 없는 소리만 늘어놓고. 습관처럼 머리를 쓸어 올리는 데 아까 느꼈던 긴 머리카락이 손가락 끝에 휘감기는 것을 느꼈다.


" 이 머리카락은 또 어떻게 된 겁니까? 난 이렇게 머리를 기른 적이 없는데?"


불만에 찬 어조.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을 나풀나풀 날리며 말했다.


"지금 당신의 모습은 당신이 아는 모습이 아니에요. 이 우주에는 수많은 차원이 존재하고, 당신이 살고 있는 차원처럼 생명체가 살 수 있는 행성만 수십, 수백억 개가 된답니다. 그런데 그 차원은 각각 독립된 영역을 지키고 있기 때문에 각 차원에는 당신과 동일한 인물이지만 각각 다른 삶을 사는 사람들이 셀 수 없이 존재한다는 거죠. 사실 차원을 넘어서 오는 인간은 거의 없어요. 불가능하기도 하구요. 당신과 같은 특수한 경우가 아니라면 더더욱 그렇죠. 당신은 '꿈'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우주를 넘어 이쪽 차원으로 넘어온 겁니다. 더 자세히 말하자면 당신을 '꿈'이라는 형태로 당신의 잠재의식이 이 차원으로 통하도록 만든거죠. 당신을 잠재의식으로부터 부른 것은 이 곳입니다. 당신 뿐 만 아니라 어둠의 절기가 올 때마다 이 차원에선 구원자들을 불렀으니까요. 그리고 당신은 원래 이 차원에 존재하던 당신과 합쳐진 겁니다. 한 차원에 같은 인물이 둘 있을 수는 없으니 모순을 피하기 위해 그렇게 된 거죠. 당신이 지금 가지고 있는 모습은 이 차원에서의 당신의 모습일겁니다."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얘기를 한다. 머리가 너무 아프고 저 무언가가 하는 말을 반도 못 알아들었다. 저건 무슨 망발이냐. 저 사람 혹시 미친 거 아닌가. 덜컥 겁이 난다. 어떡한담. 꿈이라면 어서 깨어라. 아니라면 빨리 도망을 쳐야하는데 온 몸은 쑤시도록 아프고 다리는 후들거려서 뛰지를 못한다.


"그러니까, 이 긴 머리도 이 치렁치렁한 옷도 다 여기에 있는 '내 모습'이라는 겁니까?"


그러자 그 존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 역시 기척으로 알아차렸다.


"그렇다고 할 수 있죠. 당신 차원의 당신 모습이 아니라 이 차원의 당신 모습이 맞을 겁니다. 그것이 이 차원의 생리와 환경에 적합하기 때문이겠죠."


기가 막히는데 당장 눈에 보이는 것은 이상한 모습을 하고 있는 자신. 뭐라 반박할 말이 딱히 떠오르지 않으니 쏘아붙여주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다. 꼼짝없이 돌아갈 때까진 이러고 있어야 하는 건가.


"그럼 전 뭘 하면 되죠? 당신들이 말했던 그 어둠의 절기에 앞선 구원자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러자 기척 없이 스르륵 움직이던 누군가가 그의 손을 잡았다. 오싹하도록 차가웠다.


"그들은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고 이 세계에서 사라졌답니다. 그들은 여기 없어요."


"사라지다니요? 죽는 겁니까?"


그러자 그 누군가는 살풋 웃었다.


"죽는게 아니라 사라지는거지요. 조금 다르답니다."


'그거나 그거나!!'


빽 소리를 지르고 싶은 충동을 꼭 눌러 참았다. 바보 취급 하는건가. 아무것도 모르는 곳에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왔으니 지금 자신을 가지고 노는건가. 황당한 마음에 손에 잡힌 그 무언가를 당기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몸을 내밀었다. 그러자 그는 살짝 몸을 뒤로 물리며 잘게 부서지는 가늘고 청아한 웃음소리를 내었다. 잠시 잡았던 손이 금세 떨어져 나갔다. 그 무게나 흔적도 없이.


"전 어둠에 몸이 익숙해져버린 존재입니다. 제가 원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절 잡을 수 없답니다."


별은 앞으로 무게중심이 쏠린 몸을 다시 바로잡고 말했다.


"굳이 잡으려던 건 아니었어요. 나도 모르게 그런 거예요."


별은 앞서 걸어가기 시작한 그를 뒤따라가며 말했다.


"제 이름은 한 샛별입니다. 샛별이 뜨는 새벽에 태어났거든요."


말하고 나서 갑작스럽게 밀려오는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낯부끄러움을 느끼고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외모에 걸맞은 아주 사랑스러운 이름이군요, 샛별님."


왠지 평소의 냉정 침착함을 찾을 수 없이 요동치는-부끄러움 때문에-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심호흡을 했다. 이런 기분은 또 오랜만이라고 생각하는 별이었다.


"일단 저를 따라오세요. 이곳은 어둠에 이미 잠식당해서 오래 버티기 힘들 겁니다."


그는 별을 잠시 돌아보며 말하고는 이내 소리도 없이 가벼운 걸음걸이로 앞서갔다.

무심코 올려다 본 하늘엔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달보다 크고 환한 별 하나가 떠 있었다. 아깐 분명 있는지 없는지도 알 수 없었던 별 하나. 여기에 달이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지구 식으로 비교하자면 달보다 큰 거 같다. 뭐 어쨌든 별이랑 그리 상관없는 삶을 살아왔던 관계로 그다지 감흥이 느껴지진 않는다. 단지 저 별 하나만 딱 보이니 눈에 확 띄는구나 라는 생각 뿐. 왜 저게 저렇게 갑자기 커졌을까 하는 의문도 함께.


"일단 여기서 벗어나야 합니다. 당신의 존재를 지키려는 자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자들도 있거든요."


"그 존재들이라는 게 어둠이라는 것과 관계있는 것이겠죠?"


"네. 당신을 반기지 않는 어둠의 세력이 존재하고 있어요. 그들은 이 어둠의 절기 동안 모든 것을 지배, 감시하지요. 아마 당신이 왔다는 것을 가장 꺼리고 반기지 않을 겁니다. 오히려 당신이 이곳에 올 수 없도록 손을 쓰려고 했을 겁니다."


"그렇다면 제가 여기서 무언가를 하기도 전에 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다는 겁니까?"


"네. 당신이 완전해지려면 아직 시일이 남았습니다. 그 기간 동안은 몸조심하셔야 합니다. 이 어둠의 절기는 당신이 아니면 무사히 넘길 수가 없습니다. 온전한 힘을 가지시려면 지금은 몸을 아껴야 할 겁니다."


어이없다. 뭘 하라고 불렀다면 적어도 뭘 하는지는 알려주지 않았더라도 그 전에 죽을 일은 미연에 방지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 일을 하라고 불렀는데 정작 그 일을 하기도 전에 죽을 수도 있다니. 이건 도저히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솔직히 내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 된다. 까딱하면 남 일에 나대다가 내가 먼저 자빠지는 꼴 아닌가. 죽어도 그리는 못한다. 별은 저도 모르게 이를 악 물었다.


"제가 목숨의 위협을 받는데도 이 일을 해야 하는 겁니까? 이 일을 할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데도요?"


그러나 그 존재는 계속 길을 재촉하며 서둘러 얘기했다.


"당신이 여기 온 이유는 딱 하나입니다. 이 세계를 구원하기 위해서. 하지만 다른 세계의 당신이 온전하게 이 차원으로 넘어올 수는 없었겠지요. 그러니까 이곳에 완전히 적응할 수 있을 때까지 조금만 기다리면 됩니다. 여기서 조금만 가면 어둠의 세력이 침범할 수 없는 당신만의 장소가 있습니다. 속히 저를 따라 오시지요."


그때였다. 무언가가 별의 눈앞에 날아든 것은.


휘익- 퍽-.


별은 너무 놀라 눈만 껌뻑이고 있었다. 심하게 놀란 나머지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바로 발 앞에 박힌 것은 새까만 화살이었다. 그것도 새까만 철로 만든 듯 매우 예리하고 단단한 것이었다.


딸꾹-.


별은 저도 모르게 딸꾹질을 했다.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줄 알았다. 별은 자신을 강하게 끌어당기는 힘을 느끼고 버틸 여유도 없이 끌려갔다.


"이쪽으로, 어서요! 빨리빨리 움직이셔야 합니다! 그 녀석들이 지척에 와 있습니다!"


"제, 제가 여기 온 것을 그들도 알고 있나요?"


새하얗게 질린 별이 말을 더듬었다. 그러나 그 존재는 더욱 강하게 별을 잡아당기면서 급하게 말했다.


"하늘에 별이 떴습니다. 그것은 이 세계 누구라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긴 어둠의 절기에 뜨는 구원의 별 외엔 별이 존재하지 않아요."


어지간한 일에는 놀라지도 않는 그가 어디서 날아온 것인지 알 수 없는 화살 하나에 기겁하고 말았다. 아무리 인생을 감흥 없이 살아도, 그가 살던 곳은 이렇게 느닷없이 생명의 위협을 받는 곳이 아니었기 때문에 놀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저들이 나를 없애면 어둠의 절기는 끝나지 않는 겁니까?"


그 존재는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사방을 살피며 말했다.


"어둠의 절기는 이 세계의 계절이나 마찬가지죠. 되돌아오는 주기는 불규칙적이지만 꼭 찾아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절기를 무사히 넘기지 못하면 우린 어둠에 잠식되어 묻혀버리겠죠."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애기다. 그렇다면 여기 사람들은 자신의 힘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멸망의 위기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인가? 그것도 스스로 해결할 능력마저 없는데 그저 다른 누군가가 구원해주기만 기다리면서 말이다. 너무나 모순 덩어리인 이 세계가 치 떨리도록 무섭기까지 했다.


"여기에 있는 존재들은 자신의 바람과 상관없이 목숨의 위협을 받는 것이군요. 그렇다면 여기는 생명체가 살아가기 너무 힘든 곳 아닙니까?"


조물주가 마치 사람이 열악하고 지독한 환경에서 얼마나 어디까지 버틸 수 있는가를 한계선을 그어놓고 시험하는 것 같은 절망적이고 암울한 기분. 그때였다. 하늘에서 시커먼 화살의 비가 쏟아져 내린 것은.


쐐애애액-. 퍼억 퍽.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가는 화살무더기들이 바닥으로 처박혔다. 그 힘이 얼마나 센지 바닥에 반 이상이나 박힌 화살들이 검게
빛나고 있었다.


"으아아악!"


별은 머리를 감싸 쥐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도무지 움직일 수가 없었다. 한 발만 내딛으면 눈 깜짝할 사이에 죽어버릴 것만 같았다.
이 망할 놈의 세계는 진짜 판타스틱해서 죽음의 위기조차 리얼한 꿈만 같다. 머리에서 쥐가 나는 듯이 아파온다. 차라리 꿈이었다면 즐기기라도 할 텐데.


"위험합니다! 움직여요 어서!!"


다급한 목소리와 함께 휙 자신을 잡아채는 존재. 자신의 허리에 팔을 감고는 순식간에 땅을 박찼다. 단단하게 끌어안긴 허리춤을 내려다보고 자신을 가볍게 옆구리에 끼고 날듯이 달려가는 존재를 바라보았다. 역시 선명하게 보이지 않았다. 별은 자기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자기가 있었던 곳이 나무가 울창한 숲길이었던 것과 자신의 뒤로 정체를 알 수 없는 그림자들이 휙휙 잔상을 남기며 쫓아오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한 가지 더 알게 된 사실은 자신이 있었던 곳에 있던 나무들은 온통 새까맣게 벌집이 되어있다는 것이었다.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는 걸 느끼면서 별은 자신을 끼고 달리는 존재의 궁둥짝이라도 차주고 싶었다. 얼른 달려! 더 빨리 달리란 말이야 이 쓸모없는 것 같으니!! 라고 소리치며 채찍질이라도 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너무나 현실성 없는 현실에 점점 미쳐가는구나 라고 생각하는 별이었다. 뒤에서 휘익 휘익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아슬아슬하게 몸을 스쳐 지나가는 화살들과 정체를 알 수 없는 빛 무리. 이런 식으로 목숨을 위협받게 되다니 오히려 신기할 지경이었다. 자신을 안은 존재는 요리조리 잘도 피해가면서 날듯이 달렸다. 자신들이 땅을 디뎠던 곳은 여지없이 움푹움푹 파이거나 시커먼 화살더미로 변했다.

by arenia | 2011/02/21 22:51 | 밤에 관한 단문 | 트랙백

03. 어둠에 녹아드는 별-(1)

꿈을 꾸었다. 꿈에서 본 하늘은 새까만 어둠으로 뒤덮여 있었다. 달도 뜨지 않은 밤인가보다. 누군가가 하늘을 올려다보는 내 곁에 서 있었다. 그 누군가는 손가락을 뻗어 하늘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별도 없는 까만 밤이죠? 여기에선 별이 뜨면 전부 저 어둠이 삼켜버려요. 별은 어둠이 있어 빛나지만 어둠에 묻혀버리면 그 흔적을 찾을 수 없지요."


꿈이여서일까. 나에게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누군가에 대해 궁금하지 않았다. 단지 내가 사는 곳도 별을 잘 볼 수 있는 데는 아니니까.


"당신은 곧 저를 만나게 될 거에요. 이번의 별은 당신이에요."


'별...이라.."


제 앞가림도 제대로 못하는데 무슨 얼어 죽을 별인가. 그저 코웃음만 친다. 뭐가 뭔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비웃음이 새어나온다.

'이딴 꿈까지 정말 웃기지도 않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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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아, 일어나. 학교 갈 시간이다."


늘 가는 학교는 가끔씩 진저리치게 싫을 때가 있다. 빡빡한 등교시간부터 빽빽한 수업시간표에 얽매여 이리저리 휘둘리면 말도 못하게 짜증이 난다. 게다가 내가 반기는 이도 나를 반기는 이도 없는 삭막한 곳 일뿐. 그저 이 지긋지긋하게 되풀이 되는 일상이 빨리 끝나기만을 바란다. 언제나 나에게 선택할 권리는 없다. 그저 이 몹쓸 운명이 가리키는 방향대로 휘둘릴 뿐이다. 매일 가는 학교는 이제 싫다고 할 기력조차 남아있지 않다. 기계적으로 세수하고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학교로 간다. 왜 목숨 걸고 가야하는지 도무지 알지도 못하는데.


"킥킥 우리 꼬붕님 오셨네~? 여전히 창백한 꼬라지구만? 이봐 이봐 이렇게 화창한 날에 딱딱하게 굴지말고 활짝 웃으라고. 이쁜 얼굴이 아깝잖아. 안 그래?"


낄낄낄. 와하하하. 왁자지껄 시끄러운 소리가 한 귀를 통과하여 다른 쪽 귀로 빠져나간다. 자기들이 세상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유치하고 어린 아이들은 별의 머리를 툭툭 쳐대며 마음껏 조롱하고 있었다. 아무런 표정의 변화가 없는 별은 얼음 같은 무표정을 유지한 채 가방을 책상에 올리고 고개를 가방에 처박고 엎드렸다. 하등의 쓸모도 없는 일에 발끈하여 에너지 소모를 하는 것이 싫었다. 좀 내버려뒀으면 좋겠는데 처음에 호기심으로 걸어오던 시비를 받아주지 않자 오기와 악의로 똘똘 뭉쳐 더욱 집요하게 달라붙었다.

별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싸 안고 가방을 벤 채 고개를 들지 않았다. 이것도 저것도 모두 다 싫었다. 짜증이 솟구쳤다. 다 집어치고 싶지만 능력이 모자라니 참는거다. 그 때 누군가가 별의 책상을 발로 걷어찼다. 우당탕 소리와 함께 별은 책상과 함께 교실 바닥에 넘어졌다. 별은 천천히 일어나 책상을 세우고 가방을 챙겨들고 일어섰다. 아무런 표정 없는 얼굴에 눈동자만 유리알처럼 반질반질 빛나고 있었다.


"....저질스럽고 찌질한 새끼들."


혀를 차듯 속삭이듯 툭 내뱉은 별은 주변의 무리를 밀쳐내고 교실을 빠져나갔다.


"야!! 저 새끼 잡아!"


하고 소리를 질렀을 땐 이미 별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들은 별이 학교를 빠져나갔다고 생각하고 쫓아가기를 포기했다. 그런데 별은 정작 학교 옥상에 있었다. 옥상의 평평한 바닥에 누워 파란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봄바람이 살랑 불어 별의 머리칼을 흐트러뜨리고 지나갔다. 조금은 진정이 되는 마음을 다스리며 별은 눈을 감았다. 이유 없이 너무나 나른하고 피곤했다.


'곧 만나게 될 거에요.'


두둥실 떠오르는 듯한 감각과 이내 눈앞에 펼쳐지는 새까만 우주의 끝없는 광경. 지구에서 시작하여 점점 위로 떠오르는 몸은 우주공간을 부유하고 있었다.

태양, 지구..토성..목성....관측이 힘들다는 명왕성. 그보다 더 멀어지면서 보이는 우리 은하. 더욱 더 멀어지면서 보이는 다른 생명체가 있을 법한 어느 은하. 어느 성단......

고요한 우주공간을 두둥실 떠다니는 자신이 이해가 되지 않았던 별은 눈을 천천히 깜빡 거렸다. 얼마나 떠 왔을까. 갑자기 주변이 싸늘해지는 기분에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그야말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새까만 어둠 속. 조금 전까지 보이던 거대한 별무리들은 흔적조차 없이 사라져있었다. 본능적인 두려움에 다급한 고갯짓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갑자기 떠다니던 몸이 속력을 더해 어느 한 곳으로 급격히 딸려가더니 거대한 암흑구멍 -블랙홀 같은- 속으로 한 순간에 쑤욱-빨려 들어갔다.


"헉!"


별은 무언가에 놀란 듯 번쩍 눈을 떴다. 변함없는 푸른 하늘, 하얀 학교 건물. 별은 이마에 흥건한 땀을 닦으며 일어나 앉았다. 너무나 생생한 꿈, 우주를 맨몸으로 부유하는 꿈은 평소 자신의 삭막한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어쭈? 요게 여기 숨어있었네? 수업도 땡땡이 치고 자빠져 잤냐? 간이 아주 팅팅 부었구만?"


아까 자신을 괴롭히던 양아치 무리들이 옥상에 올라와 있었다. 입에는 하나같이 담배를 삐딱하게 물고 넥타이가 매여 있지 않은 교복 셔츠는 목깃이 풀어헤쳐져 불량스러움을 강조했다. 별은 깐죽거리는 양아치들을 무시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교복을 툭툭 털었다. 별이 자신들을 무시하자 양아치들은 길길이 날뛰었다.


"이 자식이 겁 대가릴 상실했나? 그 무표정이 어디까지 가나 보자고!"


그렇게 씩씩거린 덩치 한 명이 별에게 다가와 멱살을 움켜쥐었다. 별은 가볍게 공중으로 들렸다.

막 주먹질을 가하려던 덩치가 그보다 더 좋은 생각이 났는지 별의 멱살을 쥐고 그대로 난간으로 끌고 갔다. 별은 목이 죄이는 고통에 제대로 반항하기도 힘들었다.


"네 놈의 건방진 태도를 무릎 꿇고 싹싹 빌지 않으면 여기서 떨어뜨릴테다! 어서 울면서 잘못했다고 빌어!"


비열하게 웃는 덩치는 별의 멱살을 붙든 채 난간 밖으로 별의 몸을 밀어냈다. 난간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리게 된 별은 덩치의 손이 조금씩 부들부들 떨려오는 것을 느꼈다. 아마 자의가 아니더라도 이대로라면 팔의 힘이 빠져 자신은 떨어질 판이었다.


"어서 빌어! 그렇지 않으면..."


뒤에서 덩치의 패거리들이 점점 다가왔다. 그리고 그들은 덩치의 주위를 에워싸며 별에게 더욱 위협을 가했다. 별에게 이렇다 할 아무런 반응이 없자 패거리 중 성질이 급한 한 명이 참지 못하고 별에게 주먹을 날렸다. 그 순간 멱살을 잡고 있던 덩치의 손에서 목깃이 미끄러진 별은 그대로 옥상 밖으로 추락했다. 화단이나 부드러운 흙이 없는 콘크리트 바닥으로 곤두박질 친 별은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별을 괴롭히던 양아치들은 다들 하얗게 질려 앞 다투어 옥상을 빠져나갔다.


"사람이 떨어졌다!! 옥상에서 사람이 떨어졌어!!!"


학교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더럽게 아프군.'


이라는 생각을 끝으로 별의 의식은 깨끗이 끊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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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별이야! 하늘에 별이 떴어!!!!이번 암흑의 별이다!"


캄캄한 하늘. 별 하나 달 하나도 없는 어둠의 절기. 끈적끈적한 어둠이 걸쭉하게 하늘에 늘어져 있었다. 그 곳에 희미하게 떠오른 빛 한 줄기. 드디어 이 세계의 별이 뜬 것이었다.


"곧 올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 목소리는 익숙한, 하지만 얼굴을 모르는 누군가의 것이었다.

by arenia | 2011/02/21 22:09 | 밤에 관한 단문 | 트랙백

가위

새까만 어둠. 가만히 서서 어둠에 눈이 익길 기다리는데, 뚜벅 뚜벅 하는 발자국 소리. 그 소리는 점점 커지더니 이내 자신의 뒤에서 들리는 탁 탁 탁 탁 곧이어 두두두두두두두두 전속력으로 달려오는 소리.  누군가 쫓아오는 소리 같아서 갑작스레 사로잡힌 공포감에 얼른 뒤돌아 도망가는데, 어째서인지 그 소리는 멀어지지 않고 간격을 좁히면서 따라온다. 금방이라도 붙잡힐 것 같아서 온 힘을 다해 도망가다가 어느 순간 뒷덜미가 쭈욱 당기는 느낌이 나고, 의지와 상관없이 돌아보는 찰나-, 헉 하는 소리와 잠에서 깬다. 그리고 뜬 눈으로 멍하니 주변을 살피고 난 뒤, 식은 땀을 훔치며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눈 앞에 보이는 것은 시커먼 그림자를 드리운 거대한 무언가.
이글루스 가든 - 매일 매일 한 편의 글쓰기.

by arenia | 2011/02/21 21:52 | A monolog | 트랙백

독서-그녀의 인생역정

나른한 평일 오후의 한가로운 커피숍. 사람이 드물어 조용한 곳에 여자와 남자가 앉아있다.


“자기, 사실 나 임신했어.”


여자의 청천벽력 같은 한 마디. 남자는 서슬이 퍼래져서 어쩔 줄 모른다. 남자의 안절부절못하는 얼굴을 보며 여자는 느긋하게 묻는다.


“자기, 어떻게 할 거야?”


남자는 섣불리 대답하지 못한다. 한 눈에 보기에도 기뻐하기보다는 당황하는 모습. 곤란해하는 표정으로 남자는 입을 연다.


“미안하다. 난......아직 책임질 준비가 안 되었어. 너에겐 정말 미안하지만 우리 다시 생각하자....”


여자는 살풋 웃었다.


“그래, 자기가 그럴까봐 나, 미리 지우고 왔어. 잘했지?”


여자의 밝은 목소리, 하지만 남자의 얼굴은 엉망진창으로 일그러진다.


“너 어떻게 나와 한 마디 상의도 없이 그런 일을 할 수 있어!!!!!”


하지만 여자는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어차피 자기에게 필요 없을 것 같았어. 원치 않은 임신 따위. 나 이제 자기에게 더 기대할 것 없으니 우리 이만 헤어져. 다시는 나 찾지 마, 연락도 하지 말고.”


아무렇지도 않게 이별통보를 하고 그녀는 먼저 자리를 뜬다. 멍해 있는 남자를 뒤로하고 커피숍의 문을 열고 나갔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배를 가볍게 어루만지고는 아무런 미련없이 그 자리를 떴다. 나는 여기까지 읽고 한숨을 쉬며 책을 덮었다. 궁금한 뒷부분은 나중의 즐거움으로 미뤄두기로 했다. 앞으로 펼쳐질 그녀의 파란만장한 삶은 천천히 즐겨야겠다.


이글루스 가든 - 소설가가 되고 싶습니다!.

by arenia | 2011/02/21 21:50 | A monolog | 트랙백

01.혼자-<3>

"해현군! 정신차려 해현군~!"

그때 옆방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해현의 모친과 한 남자가 뛰어 들어왔다. 최면에서 스스로 깨다니 아주 위험한 상태가 될지도 모른다. 담당의는 해현을 단단히 붙들었다.

"당신은 제가 셋을 세면 잠에서 깨어납니다! 하나-둘-셋-"

그러자 뻣뻣하게 굳었던 해현의 몸이 스르륵 풀리면서 눈이 감겼다. 의자에 풀썩 쓰러지듯이 누운 해현은 조금의 시간이 흐른 후 서서히 깨어났다. 해현의 눈앞에는 최면을 유도한 담당의와 낯선 남자, 그리고 자신의 모친이 근심어린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해현군, 이제 정신이 들어?"

자신의 담당의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해현은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내가 누군지 알아보겠어? 괜찮은거야?"

담당의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강하게 한 차례 고개를 저어댄 해현은 한층 초점이 또렷해진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곤 담당의를 향해 말했다.

"아, 전 괜찮아요…그런데 머리가 깨질듯이 아파요…"

담당의는 해현을 여기저기 살펴보더니 한결 안심한 듯 표정이 조금 풀렸다.

"하마터면 큰일날 뻔 했어. 도중에 해현군에게 건 최면이 풀려버렸거든."

그러자 해현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가 최면에서 깼다구요? 의사선생님이 풀어주신 게 아니에요?"

"최면 상태에서 갑자기 깨는 경우는 흔치 않아. 보통 시술자의 지시에 따르게 되어있는데 이례적으로 해현군은 도중에 스스로 깨버렸어."

"아, 전 치료가 끝나서 의사선생님이 깨워주신 줄 알았어요."

"흠…해현군은 그럼 최면에 들어갔을 때를 기억하지 못하는 겁니까?"

그때 해현의 모친과 함께 뛰어들어 온 남자가 해현을 향해 물었다. 해현이 절로 기가 질릴 정도로 서늘한 인상을 가진 그는 잔잔하게 가라앉은 눈을 하고 있었다.

"아, 뚜렷하진 않지만 최면에 걸렸을 때의 기억은 있어요. 다 기억할 진 모르겠지만요."

그러자 해현의 담당의는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이마를 손끝으로 문질렀다.

"최면에서 거의 강제적으로 깨어나서 알아낸 정보가 별로 없어. 그래도 앞의 최면에서 얻은 것들을 토대로 상담을 진행해보자. 나중에 다시 최면을 시도하더라도 오늘은 더 이상의 최면치료는 안될 것 같다."

그러자 해현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해현의 조그만 얼굴에는 식은땅으로 흠뻑젖어 고슬고슬한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달라붙어 있었다.

"자, 먼저 네가 본 것은 6살 때의 기억이었니?"

그러자 해현은 고개를 작게 저었다.

"잘 모르겠어요. 어릴 때 일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아요. 그래서 그게 제 기억인지 아닌지도 확신할 수는 없어요."

"좋아, 그러면 네가 보았던 그 집은 기억이 나지?"

"네, 기억에는 분명히 없는데 아주 익숙하고 그리운 느낌이었어요. 굉장히 깔끔하고 소담한 양옥이었거든요. 조그마한 정원도 딸려있는 집이었는데요, 전 아무런 의심 없이 거기가 우리 집이라고 생각 했어요."

"그럼 지금 살고 있는 집이 아니란 말이니?"

"…네. 지금 살고 있는 집과는 전혀 다른 곳이에요."

"그렇다면, 방금 전 최면을 통해서 본 것, 알게 된 것을 모두 말해보겠니?"

해현은 한참 생각했다. 무언가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한 듯 해현의 반듯한 미간이 미미하게 주름져 있었다.

"처음에 전, 잠에 빠지는 것처럼 몽롱했어요. 그러더니 어느 순간, 어떤 집 앞에 서 있었어요. 그곳은 아마 잃어버린 기억 속에 있는 나의 집 일거라 생각해요. 주변을 둘러보니 아기가 타는 작은 그네가 매여 있고, 아기가 타는 조그만 자동차도 있고, 아마 이 집엔 그 물건들의 주인인 아기가 있을거에요. 그게 저구요. 그 후에 집에 들어가려 여러 번 시도했지만 발이 떨어지지 않았어요. 저는 그 집에서 안락함 보다는 공포를 먼저 느꼈거든요."

"음, 그렇다면 해현군에게 큰 충격을 준 것에 대해 얘기해보자. 아까 내가 집 안을 들여다보라고 했었지? 그때 무엇을 보았는지 얘기해 주겠니?"

해현은 한참동안 말이 없었다. 무언가 고민하는 듯 미간을 찌뿌린 채 미동이 없었다.

"그런데 말이다. 넌 내가 몇 살이냐고 물었을 때 망설임 없이 여섯 살이라고 답했어. 최면이라는 건 잠재의식을 알아보는 거니까 설사 네가 지금 기억 못한다고 해도 그때 여섯 살이라고 한 건 사실일 가능성이 크다고 봐."

"네, 아마 맞을거에요. 제가 거기 그 장소에 여섯 살의 모습으로 있었던 것이 전혀 어색하거나 낯설지 않았어요. 지극히 당연한 것처럼 느꼈거든요."

"음, 그렇다면 넌 왜 그 집에 들어갈 수 없었지? 내가 지금 가장 궁금한 점은 그거야. 그 집이 너의 집이었다면 당연히 들어갈 수 있는 거 아니야?"

"본능적으로 들어가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집에 들어갈까라고 생각하자마자 머릿속에서 사이렌이 울렸거든요. 아주 다급하게요."

"음. 그렇다면 해현군에게 가장 큰 충격을 준 것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내가 집 안을 들여다보라고 지시했었지? 넌 그때 무엇을 보고는 비명을 지르고 의식이 잠시 나가버렸어. 그때 네가 본 것이 무엇이었는지 얘기해주겠니?"

해현은 한참동안 말이 없었다. 무언가를 생각해내는 듯 미간을 한껏 찌푸리고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생각이 나지 않는거야? 기억을 떠올리기가 힘든거니?"

"…피…피…였어요. 제가 꿈에서 보았던 온통 새빨간 이미지는…피였어요...마룻바닥이 피로 뒤덮일 만큼 엄청난 양의 피...."

"그럼 충격받은게 그것 때문이야?"

"네, 아마도요. 그리고 뭔가가 더 있었던 것 같지만 그 외에 더 기억나는 건 없어요. 지금으로선 그 온통 빨간 것이 피였다는 것만 알고 있어요."

담당의는 점점 더 난감한 얼굴로 변해갔다. 이건 무슨 커다란 쓰레기통에 빠진 조그만 동전을 주우려다 동전을 더 깊숙이 밀어 넣는 격 아닌가. 말 그대로 갈수록 막막하고 갈수록 태산이었다. 담당의는 자신의 이마를 손끝으로 잠시 쓰다듬었다. 그러고는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말이야, 그 많은 피는 어디서 나왔을까? 도대체 너의 여섯 살에는 무엇이 있었던걸까?"

마치 스스로에게 자문하듯 던진 그 질문은 미묘하게 해현을 두드렸다. 그것은 현재 그가 가장 궁금해 하고 또 두려워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좋아. 일단 오늘 치료는 여기까지만 하자. 너도 충격을 받아 지금은 심신이 많이 지쳐 있을테니 아무생각 말고 집에 가서 푹 쉬어. 그럼 3일 후에 다시 만나자."

그러자 초조하게 모든 것을 바라보고 있던 해현의 모친은 해현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멍하니 앉아있던 해현은 모친이 손을 잡고 끌자 힘없이 딸려갔다.

"선생님, 우리 아이 괜찮은거죠? 잘못되는거 아니죠?"

해현의 손을 꼭 쥔 모친은 아들이 지금 당장이라도 날아가 버릴까 두려워하는 모양새로 아들을 단단히 붙들고 있었다. 그녀의 창백한 얼굴은 조금의 핏기도 없이 푸석푸석 말라붙어 버렸다.

"해현 어머니, 너무 크게 걱정하지 마십시오. 해현군이 처음으로 최면치료를 받다보니 무의식중에 거부반응이 나타난 것 같습니다. 아마 조금 휴식을 취하면 괜찮아질 겁니다."

담당의는 덤덤하게 웃으며 해현의 모친을 안심시켰다. 해현의 모친은 담당의에게 인사를 하고는 해현을 붙들고 방을 빠져나갔다. 그들이 나가고 난 후, 담당의는 해현의 치료과정을 지켜본 남자를 불렀다.

by arenia | 2011/02/07 22:40 | 幻想 44題 | 트랙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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